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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군

희망찬 미래 평화중심고성

토성면 소개

토성면 이미지
토성면 소개
  • 강원특별자치도 고성군 토성면 천진해변길 88
  • 033-632-6001
이장협의회 주민자치회

우리 토성면은 기암괴석과 깍아지른 듯한 해안 절벽 위의 천학정과 청간정, 설악산 끝자락의 속초와 고성의 경계지역에 위치해 자연의 예술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기암절벽의 극치인 울산바위 등 천혜의 수려한 자연경관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또한 각종 리조트, 콘도, 온천, 아쿠아월드 등 전국 최고의 관광 휴양시설을 갖춘 관광의 중심지입니다.

마을유래

  • 천진리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구전에 의하면 당초에는 마을의 여삼평(汝三坪) 들판에서 거주했는데 바람이 세고 반농 반어를 목적으로 점차 해변으로 옮겨 현위치에 집단부락을 형성하게 되었다. 당초에는 건진리(乾津里)로 불렀으나 잦은 천재지변(天災之變)으로 곤경에 처하자 '건(乾)'자는 마른다는 의미에서 좋지 않으므로 조선 말엽경 천진(天津)으로 개칭하게 되었으며 재해를 방지하기 위하여 방풍림을(천진솔밭) 조성하였다고 한다. 1970년 7월 1일 행정구역 개편으로 주도로를 기준으로 하여 동쪽은 천진1리, 서쪽은 천진2리로 나누어져 현재에 이르고 있다.

  • 청간리

    확실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조선시대 부터 '군선리'라고 불리어 왔다고 하며 옛 주민들은 현 청간리(淸澗里) 상수도 서쪽 안터평에서 거주하였다고 한다. 현재 청간리 청간정(淸澗亭)이 있는 산 및 해변에는 옛날 궁창(창고) 및 군부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하며 군부대가 주둔지를 옮긴 후 주민은 안터에서 해변가로 이주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 하는데 현 마을명은 그이후 청간정 건립과 함께 청간리(淸澗里)라 불리어 왔다고 한다.

  • 아야진리

    옛 조상들의 구전에 의하면 마을 속칭명을 구암리(龜岩里)로 불러왔는데 아야진 등대한 위치한 바위가 거북처럼 생겼다고 하여 거북 '구(龜)'자와 바위'암(岩)'자를 써서 유래되었다고 하며 그후에는 애기미로 애칭되고 있다. 마을의 평안과 자손들의 번창함을 빌기 위하여 남쪽마을의 여자의 신을 모신 작은 서낭(암서낭), 북쪽 마을에 있는 남자의 신을 모신 큰 서낭(숫서낭)에서 매년 산신제를 지내는 풍습이 전래되어 오면서 현재의 아야진 5,6리 지역인 여자의 신을 모신 마을을 작은 애기미라 칭하고 남자의 신을 모신 1,2,3,4리 마을을 큰 애기미라 애칭한 것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아야진으로 부르게 된 동기는 현재의 아야진6리 교회로 접하는 아야진에서 교암리로 넘어가는 산(山)형태가 잇기'야(也)'자처럼 생겼다고 하여 우리라는 뜻을 포함, 아야진(我也津)으로 부르게 되었으며, 1955년 7월 1일분할되어 아야진을 1,2,3리로 구분 하였으며, 다시 행정구역 조정으로 1972년 7월 1일 부로 1,2,3,4,5,6리로 분할 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 금화정리

    마을안 정자가 있었고, 정자주변에 꽃이 피어있었다고 하여 금화정(錦花亭)이라고 부르고 있었는데 1972년 7월 1일 행정구역 조정으로 아야진 7리에 속해 있다가 1997년 6월 5일자로 고성군의 리 명칭과 구역에 관한 조례(제16015호)에 따라 본래 금화정리로 개칭되었다.

  • 교암리

    옛날에는 천학정산(성황산) 기슭으로 도로가 놓여 있었으며 산길 중 간에는 돌다리가 놓여 있어 통행함에 따라 속칭 다리바위로 불렀는데 1972년 7월 1일 교암리(橋岩里)가 교암1,2리로 분할 되었다.

  • 백촌리

    고려말 김씨 조상이 처음 들어와 마을을 형성 할 당시 마을어귀까지 바닷물이 차서 해안과 연접된채 바다 위에 떠 있는 모양이라 하여 해상리(海上里)라 불리워 오다 조선조 초기때 잣나무가 많이 있다하여 백촌리(栢村里)로 개칭, 현재까지 불러오고 있으며, 마을 앞산 골짜기에 잣나무 숲이 남아 있다하여 아직도 잣골이라는 이름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 운봉리

    마을의 속칭명은 토성리로 운봉 토성을 현재 청재등이라 하나 이곳이 바로 토성이라고 하며 그 앞을 쪽지고개라 부르고 있으나 옛이름은 죽지고개라 했다고 한다. 고개의 이름중 운봉을 상토성(上土城)이라 부르고 죽왕면 야촌을 아래 토성이라 했으며, 마을 곳곳의 명칭으로 뒷말은 토성의 뒤에 있는 곳이라고 하여 뒷말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남운경이란 논이 있었는데 처음에는 (그시초) 그 연혁이 약500년이 되고 최초에는 權씨, 둘째는 李씨가 거주했었다. 그 후에는 현재 李씨만이 14가구가 살고 있다. 그리고 동두박에는 동그란 우물이 있었다고 하며 현재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 학야리

    옛날에는 햇골과 뒷골이 한마을로 합하여 불러오던중 1940년대 일제시대때 학야로 명명되면서 학야1리는 뒷골과 옹기점말이 한부락으로, 학야2리는 햇골이 한부락으로 독립되었으며 뒷골의 명칭은 햇골 뒤에 있다고 하여 뒷골이라하였으며 옹기점말은 100여년전부터 鄭씨 집안이 이주 정착하면서 옹기를 만들기 시작하였기 때문에 옹기점말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현재는 '옹기'자를 빼고 점말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행정구역상 1반은 뒷골이며, 2반은 옹기점말이라고 한다.

  • 도원리

    마을의 속칭명은 향도원이라 하는데 전해 내려오는 유래에 대하여 아는 사람이 없으며, 1968년 8월 도원저수지 신축공사때 현재 저수지내에 살던 주민 일부가 도원1리로, 일부는 도원3리로 각각 이주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 성대리

    구전에 의하면 약 360여년전 嚴씨 성를 가진 이가 살면서 마을이 동쪽을 향해 위치하고 마을 모양이 다락처럼 생겼다고 하여 동루동 또는 동노동리(東老洞里)라 불렀는데, 지금의 속칭명이 되었다.

  • 용암리

    옛날에 동쪽 산에 청용이 살아 청용바위, 남쪽 산에 범이 살아 범바위, 신선이 내려와 바둑을 두었다는 신선바위 등 여러바위가 있었는데 그 가운데 넓은 터가 있어 李씨와 金씨가 터를 닦고 집을 지어 살면서 마을명을 용암(龍岩)이라고 부르고 있다. 또한 서쪽에는 넓은 들과 골이 있었는데 가뭄이 들어도 샘이 계속 흐른다고 하여 속칭 장샘이골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신평리

    옛날에 성대리가 처음 마을로 형성된 후에 성대리의 남쪽으로 성남이라 부르던 곳에 새로 생긴 마을이라 하여 새말이라 명명한 것이 속칭명이 되었는데 신말(新末)은 쌀밥먹고 장작만 땐다는 마을로 그만큼 풍부하였다는 유래도 있으며 성남이란 제일 먼저 생긴 곳으로 둘레를 성으로 쌓은 남쪽에 있다 하여 부르게 된 것이다. 1991년도 신평벌판에서 제17회 세계잼버리대회가 개최됨에 따라 세계적인 명소가 되었다.

  • 인흥리

    속칭 장흥리라고 부른다. 지금으로부터 약70년전 일제시대때 인흥1리에서 성천리에 이르는 지금의 성황당 산맥으로 이어지는 언덕이 노루목처럼 생겼다고 하여 장항리(獐項里)라고도 불렀는데 그로 인해 위 언덕맥을 잘라 인재가 태어나지 않는다는 전설도 있다.

  • 성천리

    이 마을은 옛부터 시냇가 건너에 산세가 수려하고 지리적으로 잘 생긴 수자마을이 있었는데 이 마을에 장수와 용마가 났다고 전하며 장수는 비통하게도 세상에 태어나면서 죽고 장수를 잃은 용마는 마을 뒷산으로 넘어갔는데 용마능선 바위 위에 그자취가 남아있다는 전설이 있으며 이 마을이 수자벌에서 현재 마을으로 이전한 유래는 수자별 동쪽 산봉우리와 수자벌이 서로 상충하여 대화재가 발생하여 현재 마을로 옮겨졌다 하여 마을이름을 속칭 수자벌이라고 부르고 있다. 또한 성천(星川)이란 시냇가에 작은 돌이 많이 있어 하늘의 별과 같다하여 '성(星)'자를 써서 성천(星川)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하며 지금의 마을로 옮긴 후에는 화재도 없으며 마을에 탁씨가 대대 손손 살아오고 있다.

  • 원암리

    과거 미시령 고개를 넘으려면 마을을 통과해야 하기 때문에 속칭 역동네라 불리웠으며 마을 가운데 서낭봉이 있어 영을 넘을 때는 서낭봉에서 제를 올리고 넘었다고 한다. 과거에는 양양군 토성면 원암리 였던 것이 1963년1월1일 고성군 토성면 원암리에 속하게 되었다.

  • 용촌리

    옛적에는 사야지리(沙也只里)라 불렀다. 농촌마을임에도 대지 부분이 모래가 많아 속칭 사촌리(沙村里 촌모래기)라고 부르고 있으며 뒷산 용바위가 등천하였다고 하여 용촌리(龍村里)라 명명한 것이 지금의 명칭이다. 원래는 용포리(龍浦里)와 사촌동(砂村洞) 두마을을 1915년 행정구역 병합으로 용포(龍浦)의 '용(龍)'자와 사촌(砂村)의 '촌(村)'자를 합쳐 용촌리(龍村里)라 부르게 되었는데 과거의 용포리(龍浦里)는 용촌2리이며 사촌리는 용촌1리가 되었다. 최근 편리해진 교통소통에 따라 인근 속초시에 생활권이 전이되어 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 봉포리

    한일합병 이전에 해변가는 광포(廣浦), 산너머는 봉현(鳳峴)이라 칭하여 오다 한일합병 이후 1914년에 2개리를 합함에 따라 그 당시 이장 박매경씨가 봉현(鳳峴)의 '봉(鳳)'자와 광포(廣浦)의 '포(浦)'자를 따서 봉포리(鳳浦里)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