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칭 오리진(五里津)이라고도 하며 옛날 마을근처에 송지호(松池湖), 금지호(錦池湖), 번개, 버덩개(野浦), 황포라고 불리던 다섯가지의 개가 있어 오호리(五湖里)라 칭하였다고 한다. '96년 4월 23일 대형산불로 인해 울창한 주변송림이 크게 소실되었다.
지금부터 약700년전인 1285년에 향목리 정씨 선조(정씨가문 6대조)께서 울릉도에서 이마을로 이주해 오면서 3본의 향나무를 갖고와 처음으로 향나무가 크게 자라자 그때까지 없었던 마을명을 향나무와 연결하여 향목리(香木里)라 칭하였다. 현재는 향나무가 없고 그자리(현재 박화실씨 집뒤)만 남아있다.
어촌마을로 옛부터 다른 어항보다 수산물이 많이 나서 주민생활에 덕이 많이 되었다 하여 약 100여년전부터 속칭 덕포라 불렀으며 후에 작은 나루가 하나 더 생겨나자 가포진(加浦津 더포)이라고 불리웠는데 1914년 리명 개편시 가진리(加津里)로 고쳤다.
지금부터 약 400년전에 간성 현감 이택당이 선유담에서 작시한 글에" 공수왕처세방회(公須往處勢方回)"란 글을 인용하여 속칭 공수진이라 하였는데 1970년 행정구역 폐합으로 공수진리의 '공(公)'과 인근부락 장현리의 '현(峴)'을 합하여 공현진리(公峴津里)가 되었다.
조선시대 금성(錦城), 왕곡(旺谷), 적동(笛洞)으로 불러오다가 한일합 방과 동시에 금성, 왕곡, 적동이 합하여 오봉리(五峰里)로 되었다. 마을의 뒷쪽에는 오음산(五音山)이라는 산이 있는데 이 산의 정상에 올라가면 주위에 있는 장현리(長峴里), 왕곡리(旺谷里), 적동리(笛洞里), 서성리(西城里), 탑동리(塔洞里) 등 6개 마을에서 들려오는 닭소리와 개짖는 소리까지 들을 수 있다하여 오음산(五音山)이라 불렀다고 하며 오봉1,2리를 중심으로 5개의 높은 산이 둘러서 있어 오봉리(五峰里)라 불렀다고 한다. 또한 오음산에 대한 다른 전설로는 옛날 산밑에 선유담이 있었는데 신선이 이 산에 성 오음육율을 즐겼다하여 오음산이라 칭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옛적에는 순포리(蓴浦里)라고 하였는데 순포리(荀浦里)라고도 하였으며,지금으로부터 520년전(1415년)에 형성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원래 순포 서북방 300m지점에 3㏊의 넓은 늪(개)이 있었는데 그 주위에 풀이 무성하여 풀이름 '순(荀)'자에 호수'포(浦)'자를 써서 순포라고 불렀다. 현재 그곳은 논으로 변하고 인근 산야 및 집 주위는 대나무가 무성하다. 후에 포월, 황포, 순포 등으로 부락이 분산되어 행정구역 분할시 삼포(三浦)로 개칭 되었다.
처음에는 이 마을을 감인당(甘仁堂)이라 하였고 평촌리(坪村里)라는 부,분적인 명칭이 있었다. 그러던 것이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인해 감인당(甘仁堂)의 '인(仁)'자와 화정(花亭)의 '정(亭)'자를 따서 인정1리, 2리로 명명하고 지금까지 부르고있다. 마을을 수호해 주는 봉현(鳳峴)산 아래 위치하고 있는데 이 산은 부엉이가 3일만 울면 비가 내린다 하여 봉현산이라 불러오고 있다. 산위에 거대한 바위옆(신선바위)을 지날때 이 바위에 올라 시를 읊고 글을 지으며 노닐었다고 한다.
속칭 구돈리(九頓里) 혹은 서성리라고도 하는데 서기 1564년경 유산허씨(柳珊虛氏)가 이부락을 재건했다는 전설이 있으며, 서기 1600년경에 봉화정씨(奉化鄭氏), 김해김씨(金海金氏), 순흥안씨(順興安氏) 등이 거주하여 포두리(逋頭里)로 마을이름이 통하여 오다가 그후 연대는 알수 없으나 정씨, 김씨, 안씨, 이씨 등이 거주할 당시 포두입을리(逋頭入乙里), 서파리(西派里) 등으로 계속 개칭되어 왔다. 세조때에는 간성군 남죽도면 서성리로 다시 개칭되어 그후 여러 성씨로 약 30호 가량이 거주하였다가 서기 1910년 한일합방이 되어 간성군 죽도면 구성리로, 그후 1945년에는 양양군 죽왕면 구성리로 되었으며 1963년 1월 1일 고성군 죽왕면 구성리로 개편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15년 행정구역 폐합시에 송정(松亭洞), 곡실(谷室), 삼성동(三星洞)등 세부락을 합하여 하토성리(下土城里)라 하다가 후에 다시 야촌리(野村里)라고 불렀다.
옛날에는 오랜된 소나무 1그루가 홀로 서 있다고 하여 독송정(獨松亭)이라고 했다. 1953년에 민통선이 삼포리까지 되자 수천가구가 이마을에 안착하게 되었고 행정구역 분할시 송암리(松岩里)로 되었다.
만호리, 괘진리(掛津里), 망포리, 망개리 등의 속칭이 있으며 전해오는 속칭명의 유래가 있다. 삼국시대에 신라유민들이 들어와 어업과 농업을 겸업으로 하여 살고 있었으나 고구려의 영토확장으로 고구려 군사들이 신라땅인 이 마을을 침략하였다.
이때 신라에 이름을 알 수 없는 장군이 이들과 맞서 치열한 싸움을 하였으나 갑작스런 침략과 힘의 부족으로 혼자 남게 된 장군은 이곳 해안의 바위 밑에서 장렬하게 전사 했다. 그러나 장군은 마을을 지키지 못하고 죽는 것을 한탄 하였던지 장군이 죽은 자리에 난데없이돌로된 미륵동이 생겨났다.
장군이 돌아올날 만을 기다리던 고향의 부인은 장군이 전사했다는 소문을 듣고 이곳을 찾아왔으나 기다리던 남편은 죽고 미륵동만 남아 있었다. 비통함과 애절함을 참지 못한 부인은 바닷가 미륵동 옆에서 밤낮을 슬피 울며 애통해 하다가 기진맥진하여 죽게 되었다. 죽은 후에도 남편의 혼(魂)인 미륵동을 지키지 못함을 안타까워 한 나머지 부인의 혼(魂)은 뱀이 되어 미륵동을 지키게 되었다.
죽을 때 부인은 내가 죽어 뱀이 돼 미륵동을 지킬때 나를 해하지 않고 보살펴 주면 이곳 마을은 신라사람 만호(萬戶)가 거주하여 온 주민이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다고 하였다. 이때 부터 이 마을을 만호리라고 부르게 되었으나 이 소문을 들은 고구려의 박씨란 성을 가진 사람이 부인의 혼(魂)인 뱀을 죽여버리고 말았다.
이를 본 마을주민들은 멀지 않은 시기에 곧 망하게 될 것이라고 하여 조선말엽에 와서는 망포리(亡浦里)라고 부르게 되었다가 그후 언제부터 인지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부락 앞에 개(浦)가 있고 개울을 바라보는 부락이라 하여 망개라고 불렀다. 그후 1919년에 와서 문암리로, 그리고 1954년에 현재의 문암1리로 분리 되었다.
마을 뒤 마산에 위치하여 '마좌리'라 부른다. 이 마을은 1983년 10월 5일 군부대 주둔으로 19가구에 남자 43명, 여자 38명 등 모두 81명이 집단 이주한 부락으로 현재 민간인이 살지 않는 마을이다.